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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장 기고>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회개에 대한 고찰

조경삼 목사 (엘림교회)

2025년 4월 17일

Ⅰ. 서론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는 바울 사도의 선언에 대해 나는 아니라고 항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기 속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죄 성에 대하여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술회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라고 탄식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다(딤전 1:15).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말하였고,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요일 1:10하)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 등장한 어떤 종교도 죄의 문제를 논하지 않은 종교는 없었다. 모든 종교는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으려고 기도(企圖)하였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만큼 죄의 문제에 대해 가장 심도있게 취급한 종교는 없었다. 기독교는 인류에게 닥친 모든 고통과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것을 처음부터 가르치고 있으며,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복된 소식은 이 죄의 문제를 영구히 해결하기 위하여 구세주가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말한다. 그리고 죄에서 해방되는 것은 바로 그 구세주를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요 3:16). 구세주를 믿는 믿음 가운데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회개에 대한 여러 그릇된 주장이 대두되고, 이로 인하여 개혁주의 신학체계가 흔들리고,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났었다. 일찍이 구원파에서는 구원에만 집착하며 마치 주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본인들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말하고, 본인들이 짓는 죄와 악행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칭의(구원)받았으니 죄 없다’로 합리화 및 정당화를 주장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복적인 회개와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한 점진적 성화에 대하여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관심도 없었다.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인이 반도덕적, 비윤리적 삶을 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방종과 타락에 젖게 만들었다. 이는 분명히 개혁주의 구원론에서의 회개와는 배치되는 것이며, 전혀 성경적인 사상이 아니다. 저들이 구원을 주장하지만, 66권 성경 어디에도 진정한 회개 없이 구원에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이 믿음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회개가 성령과 회개하는 자의 합작에서 오는 성과라 할지라도, 회개 없는 신앙은 없고, 신앙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회개에 연결되어 있다. 대다수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구속의 적용이 그 발단에서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구원의 서정(순서)을 소명(召命) 혹은 중생(重生)으로 시작한다. 다음에 회심의 논의가 따라오는데 회심에서 중생의 사역은 죄인의 의식생활에 투입하여 그로 하여금 자아와 사탄의 세계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회심은 회개(悔改)와 신앙을 아울러 포함하나, 신앙은 그것의 중요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따로 논술한다. 성경적인 개혁파의 구원의 서정은 소명, 중생, 회심(회개),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의 아홉 가지를 하나의 황금사슬로 하여 구원의 순서를 제시한다. 이 구원의 순서는 어느 성경 한 구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하여 얻은 결론이다.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말씀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신앙이 앞에 놓여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나는 신령적 운행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신앙과 회개는 그 전 생애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계속하여 마침내 최종적 구원의 순간까지 이어지게 된다.

Ⅱ. 본론

1. 회개의 의미

1) 구약 : 구약에서 회개를 나타내는 말로 특별한 두 단어를 사용하였다.

(1) 나함(נחם)

이 말은 ‘후회한다’, ‘탄식한다’, ‘아파한다’, ‘회개한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이 회개에 대해서 사용될 때 계획과 행동까지를 수반한다. 한문의 회개(悔改)에서 ‘뉘우칠 회(悔)’자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예리미야 선지자는 당시 유대 백성의 회개치 않음을 탄식하여 예언하기를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 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렘 8:6)라고 하였다.

(2) 수브(שוב)

이는 ‘돌아온다’는 뜻으로 한문으로는 회개(悔改)의 ‘고칠 개(改)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죄와 하나님께 대한 극적 변화를 뜻하는 회개를 표현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이는 죄악된 곳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표현한다.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에 관하여 문자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곧바로 종교적, 도덕적 의미를 취득하였다. 이 의미는 선지제서(先知諸書)에서 가장 현저하여 주께로부터 떠나갔던 이스라엘의 돌아옴을 가리킨다. 이 말은 구약의 소위 회심이란, 인생이 죄로 떠났던 하나님에게 돌아옴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이 돌아옴은 회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회개의 뜻은 우리 자신들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즉 이는 우리의 예전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뜻이다. 회개는 우리의 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전향(轉向)하는 것인데, 그 전향은 그를 순결하고, 전심으로 경외할 때 일어나는 것이요.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육신과 옛 사람의 죽은 것과 성령에 의해서 새로 사는 것으로 된다고 하였다.


2) 신약 : 헬라어에서 회개를 가르치는 단어가 상당히 많이 있지만, 다음의 세 단어를 특별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

이 말은 신약에서 동사형으로만 사용되었는데, 문자적으로는 ‘후에 관심을 가짐’을 의미한다. 이 말은 히브리어 ‘나함’(נחם)처럼 뉘우치며 마음 아파하는 감정을 나타낸다. 이 말이 신약에서는 5차례만 발견된다(마 21:29,32; 27:3; 고전 7:10; 히 7:21). 위의 성경 구절에 의하면 이 말이 회개의 요소를 강조한다는 것이 현저하다. 이 단어에는 소극적, 회고적, 감정적 요소가 채워져 있다.

(2)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동 μετανοίω)

이 단어는 신약에서 회개를 나타내는 말로 가장 많이 쓰여지고, 회개를 지시하는 명사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말이다. μετάνοια는 소유격을 취하면 ‘함께’로, 목적격을 취하면 ‘후에’, ‘뒤에’로 해석되는 μετά(메타)와 ‘마음’, ‘사상’을 뜻하는 명사 νοῦς(누스)가 합성된 단어이다. 특히 νοῦς는 ‘안다’를 의미하는 ‘γινώσκω’(기노스코)와 연관이 있는 단어로써 모두 다 의식생활에 관설한다. 우리 성경에 이 말이 모두 ‘회개’로 번역된 것은 본 뜻에 합당한 번역으로 보인다.

영국 출신 목사인 트렌취(Trench)는 이 말의 고전적 의미를 다음의 몇 가지로 설명하였다.

① 후에 아는 것, ② 후에 안 결과로 마음을 변화하는 것, ③ 이 마음의 결과로 지나온 행정(行程)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 ④ 장래를 위하여 행위를 변화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신약에서는 더욱 심오(深奧)화 하여 기본적으로 마음의 변화, 즉 과거에 대하여 보다 지혜로운 견해를 가지며, 전에 잘못한 것을 후회하며, 보다 더 우량한 생활로 변천하는 변화를 표시한다.

메타노이아는 무엇보다 마음의 일반적 변화에 관설하는데, 가장 충분한 발전에서 지능적, 도덕적 중생인 변화의 관념을 표시한다. 우리는 이 말이 마음의 변화를 표시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것의 의미가 지능적 이론적인 의식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의식, 즉 양심도 포함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될 때에는 그가 새로운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그의 의식생활의 방향, 그것의 도덕적 성질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

(3) 에피스트로페(ἐπιστροφή. 동 ἐπιστρέφω)

70인역에서 ‘메타노이아’는 ‘나함’의 역어들 중의 하나로 되었으나, ‘에피스트로페’는 ‘수브’의 역어였다. 이 말은 ‘다시 전환’, 또는 ‘전환하여 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에서 전환이라 함은 ‘돌아오는 전환’(returning)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이다. 신약에서 이 말의 명사 ‘에피스트로페’는 단 한 번 사용되었고(행 15:3), 동사형은 여러 차례 나타났다(마 13:15; 막 4:12; 눅 22:32; 요 12:40; 행 28:27 등). 이 말은 회개의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마음의 변화만 아니라 다른 한 종류의 관계가 성립되어 동적 생활이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 회개의 요소(要素)

회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는 당사자까지도 진정한 회개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깨닫고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회개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모습이나 과정이 회개의 중요한 부분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정도로는 완전한 회개를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회개는 위대한 결단임과 동시에 위대한 전환이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7문(問)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 답(答)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의 죄를 참으로 알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원통히 여기고 미워함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굳게 결심하고, 진심(盡心) 갈력(竭力)하여 지속적으로 힘써 순종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 속에 회개의 여러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다음에서 회개의 요소들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회개가 온전한 자리까지 이르게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1) 지성적 요소

지성적 요소는 자신의 무능과 오염과 유죄를 포함하는 죄에 대한 당사자의 인식의 변화이다(시 51:3,7,11). 이 요소가 성경에서는 ‘죄를 깨달음’(ἐπγίνωσις ἁμαρτίας)으로 표시되었다(롬 3:20). 그러나 사람이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죄에 대한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롬 1:32). 이러한 죄의 인식에다 다음 항들에서 설명하는 요소들을 동반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미움이나 개선은 없고,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날 뿐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조폭이나, 마약에 찌든 중독자나,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에 대해서 그의 양심마저도 참 회개의 필요성을 일으키지 못한다. 강퍅한 바로(출 9:27), 어그러진 길로 가던 발람(민 22:34), 불의의 재물을 취한 아간(수 7:20), 불순종한 사울 왕(삼상 15:24), 무죄한 피를 판 것을 뉘우치는 유다(마 27:4) 등이 자신의 죄를 시인하였지만 참된 회개에 이르지는 못했었다.

2) 감정적 요소

자기가 지은 죄를 제대로 인식하고 나면 거룩하시고 의로운 하나님께 대항하여 범한 죄로 인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고민하게 된다(시 51:1,2.10.14). 이러한 감정적인 요소는 메타멜로마이(μεταμέλομαι, 뉘우치다)로 표현된다. 이러한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9,10)이니, 곧 한탄과 실망으로 나타나는 ‘세상 근심’(마 27:3; 눅 18:23) 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소망이 있으나, 형벌에 대한 한탄과 실망으로 인한 근심에는 소망이 없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죄의 결과로 오는 공포심을 구별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의 감정은 내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에서 출발하고, 내 죄가 내게 미칠 결과가 어떠한가의 근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율법에 향한 증인이요, 성령은 은혜에 향한 증인이시다. 양심은 법적 유죄감을 가져오고, 성령은 복음의 유죄감을 가져온다. 그 하나는 실망에 이르는 유죄감을 산출하고, 다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소망에 이르는 유죄감을 산출하신다. 양심은 범한 죄, 불가능한 일, 임박한 심판을 확인하게 하고, 보혜사는 범한 죄, 전가되는 죄, 수행된 심판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인시킨다. 하나님만이 능히 죄의 신적 견해를 제시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이해하게 하신다.’

3) 결의(의지)적 요소

결의적 요소는 죄로부터의 내면적 전환과 사죄 및 정화를 추구하는 성향이다(렘 25:5). 결의적 요소는 앞의 지성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의 동작에 연속하여 일어나는 과정으로 최종적으로 귀결짓는 것이니 회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요소는 성경에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라는 말로 표시되었다(행 2:38; 롬 2:4). 이는 죄로 인한 근심이기보다는 죄를 버림이며, 민감(敏感)의 상태이기보다는 의지의 행동이다. 이는 죄의(of) 회개나, 죄로 인한(for) 회개가 아니라, 죄로부터(from)의 회개이다. 이런 회개는 탕자의 비유(눅 15:17-21)에서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회개는 방향을 전환하여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3. 회개의 필요성

복음은 우리가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얻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회개의 복음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4:47,48).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모인 무리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였고(행 2:38), 바울 사도도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증거 하였으며(행 20:21), 히브리서 저자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을 그리스도 도의 제1원리 중의 하나로 꼽았다(히 6:1). 그리스도 안에 새 생활은 우리를 죄의 주관 아래 속박한 줄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이러므로 신앙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성경의 치중은 결코 회개의 필요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만일 우리를 허용하여 이 악한 세상의 방식들로,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행하게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웃음거리와 속이는 것 뿐일 것이다.

1) 구원에 필요함

(1) 장년들에게 절대 필요하다.

개혁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한 교훈에 근거하여 중생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에 먼저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요 3:3,5). 이는 유아기에 죽은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중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한 유아들이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전향하는 회개를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의식(自意識)에 이르기 전에 죽은 아이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기 불가능하다. 그러나 변별의 연령에 도달한 모든 사람에게는 중생의 결과인 회심이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라는 것을 재빨리 살펴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성적으로 응답하기에 충분하게 성숙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참으로 근심하여 복음에서 그들의 구주로 제출된 그리스도를 성실히 믿고 새로운 순종의 길에 행하는 시작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 절대 필요를 외칠 것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한 선구자 세례 요한은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도개인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고(마 3:8). 예수님의 공생애의 제일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었다(마 4:17).

회개의 절대 필요성을 교훈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전도자들은 회개의 필요성을 외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회개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나, ‘망하리라’, ‘죽으리라’고 한 말씀들은 회개가 구원에 절대로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라고 끊임없이 외쳐야 한다.

2) 사죄에 필요하다.

회개의 경험이 구원을 받는데 필요하나 속죄의 공로를 구성하지 못하며, 회개한 사람이 사죄를 받을 이유를 조성하지 못한다. 회개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사죄 받은 줄로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회개가 사죄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은 ① 율법은 사람의 완전하고 영구한 순종을 요구하고, ② 회개는 과거의 죄에 대한 보충이나 보상이 아니며, ③ 회개는 죄에 대한 통감과 고백이며, ④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는 사죄에 필요하다. 회개가 사죄받을 공로를 구성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받음에 필요한 도덕적 적당성을 준비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죄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받을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선물을 받는 입장에서의 선 요건이다.

3) 성령 충만의 삶에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는 심령에는 사죄의 은사가 오지 않는다. 앞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그릇을 청결하게 해야 할 것을 언급하였다. 성도의 마음은 성령의 전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재하실 우리의 심령이 어둡고 추한 죄로 가득 차 있다면 성령의 자리가 어디이겠는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은 격한 감정이 아니라 성도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충만이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그 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가 없다. 자신이 지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여 깨끗한 심령이 될 때 성령은 그의 전인격을 주관하시고, 그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의 성화(聖化)에 필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3장 성화(聖化)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된다. 그리고 온 몸을 지배하던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진다. 또한,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되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① 행 20:32, 빌 3:10, 롬 6:5,6

② 요 17:17, 엡 5:26, 살후 2:13

③ 롬 6:6,14

④ 갈 5:24, 롬 8:13

⑤ 골 1:11, 엡 3:16-19, 벧후 3:13

⑥ 고후 7:1, 히 12:14

⑦ 살전 5:23

⑧ 요일 1:10, 빌 3:12, 롬 7:18,23, 갈 5:17, 벧전 2:11

⑨ 롬 7:23

⑩ 롬 6:14, 요일 5:4, 엡 4:15,16, 벧후 3:18, 고후 3:18, 7:1

(2) 이 성화는 온 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 금생(今生)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는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로 인하여 계속적이고 화해될 수 없는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슬러 싸운다.

(3) 이 싸움에 있어서, 그 남아 있는 부패성이 얼마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 받음으로써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된 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완성해 나간다.

위의 성화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① 신자들의 중생한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보될 수 있다.

② 이렇게 진보하는 가운데서 신자가 죄에 대하여는 점차 죽고 의에 대하여는 점차 살게 된다.

③ 이 성화의 사역은 온 인격에 퍼져있다.

④ 금생에서는 완성되지 못한다는 점, 즉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금생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⑤ 그러나 모든 참된 신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온전히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는 까닭에 참된 진보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중생은 독립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것은 우리의 심령의 밖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직접적 사역, 성령의 동작이요, 우리는 전적으로 피동적이다’고 하였다. 이처럼 중생은 성령의 단독 사역이나 성화는 그렇지 않다. 성화는 하나님의 공작적 사역이긴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방편을 사용하여 항구적으로 증진하는 성화를 추구하여야 한다. 이 성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성령은 회개하지 않은 심령에 역사하시지 않는다. 적어도 중생한 신자는 거룩하게 성장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 죄를 자백하여 용서를 구하며, 그 죄에서 온전히 돌아서야 한다. 참된 회개가 없이 거룩한 삶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4.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 말하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

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 5대 표준문서는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예배모범, 정치이다.

1) 신앙고백서에 말하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

(1)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슥 12:10; 행 11:18). 이 회개의 교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교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든 복음의 사역자들에 의해 전파되어야 한다(눅 24:47; 막 1:15; 행 20:21).

(2) 회개로 말미암아 죄인은 자신의 죄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악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그의 의로운 율법에 반대되는 것임을 눈으로 보고 깨닫는다. 또한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게 되며, 그리하여 모든 죄에서 방향을 돌려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겔 18:30,31; 36:31; 시51:4; 고후7:11). 그리고 그의 모든 계명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기로 작정하고 또한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겔 18:30,31; 36:31; 시 51:4; 고후 7:11).

(3) 회개가 죄에 대한 어떤 속죄적 배상이 되거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이 되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겔 36:31,32, 16:61-63).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호 14:2-4; 롬 3:24; 엡 1:7). 그렇지만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함 없이는 죄 사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눅 13:3,5; 행 17:30,31).

(4)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그것이 너무 작은 것이기 때문에 정죄 함을 받지 않아도 되는 죄는 없는 것처럼(롬 6:23; 5:12, 마 12:36; 약 2:10). 아무리 큰 죄 일지라도 그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정죄를 가져오는 일은 없다(사 55:7; 롬 8:1; 사 1:16-18).

(5) 사람들은 일반 회개로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각자 자기의 죄들을 낱낱이 개별적으로 힘써 회개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시 19:13; 눅 19:8; 딤전 1:13,15).

(6)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하며 그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해야 한다(시 51:4-9,14; 32:5,6). 그렇게 간구할 뿐만 아니라 그 죄들을 버리는 행함으로 옮길 때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게 된다(잠 28:13; 요일 1:9,13). 그러므로 자기의 형제나 또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험담한 사람은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자기의 죄를 기꺼이 고백하고 통회하며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회개한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약 5:16; 눅 17:3,4; 수 7:19) 그리하여 그들은 그 회개한 사람과 화목해야 하며 사랑으로 그를 영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고후 2:8; 갈 6:1,2).

2) 대·소요리문답에서 말하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

(1) 대요리문답

문 :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가 무엇입니까?

답 :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란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는 구원의 은혜를 말한다. 즉 자기의 죄의 위험성과 더러움과 추악함을 보고 느끼고 통회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고 참회하면서 자기의 죄에 대하여 몹시 슬퍼하고 죄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모든 일에 새롭게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그러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2) 소요리문답

문 :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의 죄를 참되게 느낀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슬퍼하고 미워한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서며 새롭게 순종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지속적으로 힘써 순종하는 것이다(행 11:18, 2:37-38, 욜 2:13, 렙 31:18-19, 겔 36:31, 고후 7:2,10, 롬 6:18).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서는 신앙고백서나 대소요리문답, 공히 회개가 구원 얻는 은혜라는 점을 말하고, 이러한 은혜는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죄인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통회하며,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은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로써 성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으로 규정짓고 있다.


5. 회개의 열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 3:8)고 하였다. 우리의 선한 신앙생활은 거기에 합당한 열매가 있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이다. 회개하는 성도에게 그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날 것이다. 그 열매는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그에게 영육으로 유익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1)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것이다.

눅 18:9-14에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워 기도하지만, 세리는 눈을 들어 차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였는데,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자비의 문전에서 자신이 지은 죄로 비참한 자신의 상태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게 될 것이다.

2) 성령의 충만을 받을 것이다.

앞에서도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서 회개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앞에서 말한 것은 그의 삶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었고, 여기서는 그의 모든 믿음의 상태에서 성령 충만은 진정한 회개의 기도로부터 얻어지는 열매라는 것이다. 회개 없이 성령충만한 기도나 찬송이 있을 수가 없다. 회개 없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그에게 있겠는가?

3) 그의 삶의 진정한 회복과 개선이 있을 것이다.

죄는 우리의 모든 삶을 망가뜨린다. 그 망가진 인생을 제대로 돌려놓는 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과거의 죄를 소멸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설계를 하게 되고, 새로 마련된 길을 걸어갈 수 가 있다. 죄로 더럽혀진 의복을 벗은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신앙인의 길을 걸어감으로 그의 삶의 진정한 회복과 개선이 일어날 수 있다.

4) 깨어 죄를 대적하게 될 것이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암 세포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봉한 수술과 같다. 믿음과 회개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진정한 회개에 믿음이 있고, 참다운 믿음에 신실한 회개가 있다. 올바른 믿음의 삶은 철저한 회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회개야 말로 범죄의 재발을 막는 힘을 성령으로부터 받아 밀려오는 죄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게 된다.

5)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다.

사 59:1,2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열심히 구하는 것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은 간과한다. 새로운 음식을 담으려면, 그릇에 남아 있는 상한 음식부터 비워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6. 회개의 종류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회개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려는 것이 이 지면의 임무이다. 회개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1) 국민적 회개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국민 전체의 회개가 자주 나타난다.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적으로 여호와를 배반하고 그의 진노를 겪은 후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왔다. 엘리가 사사가 되어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린 후에 죽고, 사무엘이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데, 사무엘이 거국적으로 처음 한 일은 바알과 아스다롯, 가나안 풍요의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오직 여호와만 섬길 것을 결단하기 위해서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여 회개하고 개혁 작업에 들어갔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에게 내어주어 고통을 당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회개하고 블레셋에 항거할 것을 다짐할 때, 블레셋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의지하고, 하나로 굳게 뭉쳐서 블레셋을 대적하였다. 여호와께서 도와주셔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물리치게 되었으며, 사무엘이 사는 동안 블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침노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 서시고 친히 블레셋과 싸우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로부터 돌이켜 지도자 사무엘을 중심으로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회개했기 때문이었다. 왕국 시대에도 히스기야 통치 때와 요시야가 통치할 때 국민적 회개가 있었고,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도 그들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이 내리실 재앙을 피할 수가 있었다. 이 국민적 회개는 도덕적 개혁의 성질을 가진 피상적인 종교운동이었다. 이 회개는 국민 전부가 다 참된 회개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지도자나 통치자의 지도 아래 진행하였다가 악한 후계자가 나타나면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2) 넓은 의미의 피상적 회개

이는 앞에서 말한 국민적 회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악을 버리고 세속적인 의를 행하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욘 3:10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였으나 이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도덕적 개선이라도 사회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는 있다. 그러나 구원은 성령의 은혜로 변화를 받는 회개 뿐이다.

3) 일시적 회개

성경은 중생의 결과가 아닌, 진정성이 없는 회개를 언급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이러한 영적 상태를 말씀하셨다. 즉 일시적으로 싹이 나지만 가시넝쿨이나 뜨거운 태양에 의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고사되어버리는 경우이다. 바울 사도는 후매노와 알렉산더를 가리켜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 하였다(딤전 1:19-20). 그리고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하였다(딤후 4:10). 히브리서에는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고 하였다(히 6:4-6). 사도 요한은 신실한 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나간 자들에 관하여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라고 하였다(요일 2:19).

이러한 일시적 회개는 얼마동안은 참으로 회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 회개를 경험했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계 3:1).

4) 좁은 의미의 진정한 회개

신약성경에서 회개를 가리키는 ‘에피스트레페인’(ἐπιστρέφειν)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우상이나 악으로부터 하나님께로(행 14:15; 살전 1:9), 혹은 주께로(행 9:35; 고후 3:36) 전향(轉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부터 출발하여(고후 7:10)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리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중생에 근거하여 성령에 의하여 죄인의 의식생활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이는 이전 생활의 방향이 무지나 오착이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상과 의견, 욕망과 결의의 삶의 전 행정(全行程)의 변화이다. 이 회개는 타동과 자동의 두 방면이 있는데, 타동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여 사람의 생활의 의식적(意識的) 행정(行程)에 일어나는 변화요, 자동은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로 사람이 자기 생활의 행정(行程)이 변하여 하나님에게로 전향하는 것이다.

이 진정한 회개는 우리가 신학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회개이다. 성경에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온 실례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삭개오(눅 19:8,9),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요 9:38), 사마리아 여자(요 4:29), 구스 내시(행 8:30), 바울(행 9:5이하) 등이다.

5) 반복적 회개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 믿음이 식어지고, 연약해져서 타락한 상태에 있다가 회개하고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 에베소교회에 편지하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면 애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중생은 성화(聖化)를 의미하지 않으며 주관적 성향의 변화는 성질의 완전한 정화와 동일하지 않으므로 중생의 결과로 회개한 자가 죄에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최초의 회개의 필연적 결과이며 증명이다. 카이퍼는 말하기를 ‘구원하는 의미의 회개는 평생에 한 번만 있으니 이 행위는 도무지 반복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모범에 따라 회개라는 말은 회개하였으되 뒷걸음질 친 하나님의 자녀의 돌아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는 죽음으로부터 돌아옴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길을 잃은 데서 돌아옴에 관설한다’고 하였다.


6.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

요일 1:9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보는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어떻게 사하여 주시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면 철저하게 완벽하게 완전히 사하여 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말씀으로 이를 확인시켜 주셨다. 그 예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도말하여 주심

하나님께서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25)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도말’은 있는 것을 완전히 보이지 않게 없애 주는 것을 의미한다.

②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심

사 44:22에서는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개역은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였다.

③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신다.

시 103:12에 보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였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를 동에서 서라고 말한다.

④ 주의 등 뒤로 던져버리심

사 38:17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하였다. 등 뒤로 던지면 보이지 않는다.

⑤ 완전히 사하여 주심

골 2:13-15에 ‘또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하였다.

⑥ 다시 기억하지 않으심

히 10:17,18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 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 죄를 누가 들추어낸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죄를 사하여 주시려고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고 하였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음에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사죄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너무 쉬운 것이다.

이사야 55:1-3, 6, 7에 보면 ‘오호라. 너희는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연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하였다.


Ⅲ. 결론

구원의 순서, 즉 소명, 중생, 회개,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의 9단계에서 처음 여섯 단계는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에 불과하다. 즉 그 여섯 단계는 동시에 일어나는 구원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최초의 구원 얻는 회개는 중생의 결과이며 신앙과 겹치기도 한다. 그리고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법정적 선고이며, 수양 역시도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양자로서의 권리 부여라고 할 것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가 곧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즉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를 죄 있는 자로 여기지 않고, 더 이상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사람이 갖는 죄에 대한 책임은 법적인 것이 있는데 이를 ‘법치적 죄책’이라 하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그것에 대하여 슬퍼하고 원통해 하는 것을 ‘책치적 죄책’이라고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최초의 회개와 아울러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 형벌의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속의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면하여졌다. 그러나 이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에 따른 의로운 삶의 의무가 주어졌다. 주님은 산상보훈(마 5-7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규범을 주셨다. 결과적으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마 5:48). 그러나 그러한 단계에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오를 수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자신의 허물과 부족을 깨닫고 부단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하고 경건한 삶을 통해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것을 요구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 받은 자가 된 것처럼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을 본받기를 바랐다(고전 11:1).

성경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위시한 족장들과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와 다윗이나 히스기야와 같은 훌륭한 왕들도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형적 인물인 요셉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하나같이 그들의 허물이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고, 언제나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은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일로 평생을 처절하게 회개하며 살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난 그의 범죄는 그의 가문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다.

계시록 2,3장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님이 보낸 편지(요한이 받은 계시)가 소개되고 있다.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교회에는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질 것을 권면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라고 하셨다. 버가모교회에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를 회개하라고 권하시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이라고 하셨다. 두아디라교회에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하여 그가 내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지 하려고도 하지 않음을 책망하시고, 행음한 자를 침상에 던지고,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을 당하게 하며 그의 자녀를 죽일 것이라고 하셨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을 죽은 사데교회를 책망하시고, 저들 중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가 몇 명밖에 없는데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미지근한 신앙과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하여는 저들의 가련함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상태를 지적하시고, 회개하여 금 같은 믿음과 흰옷과 같은 성결하고 영안이 밝아질 것을 권면하셨다.

아시아의 교회들은 신약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지속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는 허물과 부족함이 있고, 심각한 죄에 빠져 있다. 그렇다고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회개하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죄를 버리고 성결한 삶에 힘쓰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면 희망이 있다.

누구라도 회개하지 않고 심령의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가? 회개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가 있을까? 지은 죄에 대한 회개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신령한 은사를 부어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심령의 부흥은 회개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 회개 역시 하나님의 영에 의한 것이지만, 회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회개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알고 그 율법을 준수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의 죄를 더 많이 드러날 것이고, 그 죄에 대한 회개가 많을 때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도 더 많이 임할 것이다.

주님의 공생애의 일성이 ‘회개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처럼 계시록에서 교회에게 마지막 주신 말씀 역시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과거에 발목 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확실히 청산하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복되는 회개를 통해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함께하시는 삶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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