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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25년 2월 21일

<칼빈주의의 개혁이념을 실현하는 총회>


총회장 조경삼 목사
총회장 조경삼 목사

(발문) 이제 우리 총회는 ‘다락방 이단’이라는 무겁고 거치던 짐을 내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의 칼빈주의(개혁주의)깃발을 올리고 힘찬 항해를 시작한다. ‘개혁’이라는 명칭이 표명한 바와 같이 ‘바른 신학’, ‘바른 신앙’, ‘바른 생활’의 개혁이념을 따라서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회복하여 청교도적인 모범을 따를 것이다. 바른 신학의 정립과 함께 주님이 지시하신대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힘쓸 것이다.


1884년 개신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래 대한민국에서 교회가 놀랍게 부흥한 원동력이 되는 신학과 사상 체계가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곧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이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며,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딤후 3:16; 벧후 1:21)임을 믿고, 그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는 웅대 무비한 신학과 신앙의 체계이다.1)

칼빈주의는 존 칼빈의 신학적 이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 칼빈주의는 칼빈에 의해서 창작되었거나 처음으로 전해진 신학사상이 아니다. 역사적 칼빈주의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이다. 이는 사도 바울에 의해 완성되고, 어거스틴에게서 재발견되고, 칼빈에게서 꽃핀 신학적 체계이다. 이 신학은 온 우주와 하나님의 피조세계와 영계를 포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만 높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높이 들린 보좌 앞에 부복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케 하며, 거룩하고 불붙는 심령으로 하나님만 찬양케 하는 신학이다.2)

한국교회는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들까지도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대부분 칼빈주의 정치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칼빈주의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증거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면 어찌하여 한국교회에 칼빈주의가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가? 그것은 칼빈주의가 한국교회에서 이론으로만 전달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과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1907년 1월 6일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는 일주일 이상 계속되는 사경회가 열렸다. 이 사경회를 앞두고 담임목사인 길선주목사의 인도로 장대현교회 성도들이 새벽마다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새벽기도 모임을 가졌다.

집회가 시작되자 첫날부터 남자만도 1,500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인들은 앉을 자리도 없을 정도였다. 연일 선교사들이 인도하는 집회에서 말씀을 통해 감동을 받고 대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저녁 집회 후에 시작된 기도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다음날도 회개기도는 되풀이 되었다. 얼마나 기도가 열정적이었든지 선교사들은 그렇게 기도하다가 정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하였다고 한다.3)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대 부흥운동 이전에도 이미 성령의 크신 역사를 체험하는 부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07년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세계 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만든 중요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새벽기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칼빈주의신학을 보수하는 대표적인 신학교인 총신대 신학부 교수인 박아론 박사는 한국의 칼빈주의신학의 특성을 “새벽기도의 신학”이라고 명명하였다.4)

칼빈은 교의신학자일 뿐만 아니라 주경신학자, 목회자, 법률가, 교육가, 정치가, 사상가로서 교회,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칼빈을 종교개혁시대에 일어난 가장 복음적인 신학체계의 지도자로 여겨서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복음주의 개혁신학을 “칼빈주의”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칼빈주의 사상은 칼빈을 전후한 당시의 개혁자들 중에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어거스틴, 바울의 신학이었고, 성경 전체의 사상이었다.

중세시대에 교회가 성경의 사상을 떠나서 잘못된 길로 갈 때 개혁자들이 성경이 가르친 본래의 사상으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칼빈주의는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조직적으로 해설한 것이다. 이 시대까지 그 일을 뛰어나게 가장 잘 한 사람이 칼빈이다.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를 통해 성경의 교훈한 바를 조직적으로 체계화 하였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적 결론인 철학이나, 신비적 경험을 전달한 간증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과 하나님의 법을 포괄적으로 가르치는 사상체계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그 말씀이 멎는 곳에서 멈춘다. 이 신학은 “그것이 우리의 이성에 합치하느냐?”고 묻지 않고, “그것이 성경적이냐?”고 물으며, “그것이 인간에 유익하냐?”고 묻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고 묻는다. 우리의 삶의 모든 분야와 이 우주의 시공간(時空間) 안에 하나님의 거룩함의 인을 치며, 우리의 모든 사·언·행(思·言·行)에 그의 말씀을 새겨서 신앙과 행위의 좌표로 삼는다.

칼빈주의 신학체계는 이 우주를 황량한 버림받은 불모지가 아닌 하나님의 애정의 초점으로 보며,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그 모든 만물을 위하여 만사 만물을 그 정확한 섭리대로 생사퇴거(生死退去)케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절대 예정에서 제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 피곤한 인생들은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완전하신 지혜에 모든 것을 맡기고 평안을 얻는다.

칼빈주의는 역사적, 전통적 신학의 본류가 되었고, 이와 대치되는 알미니안주의는 지류나 간헐천(間歇川)이 되었다.

이 신학이 어거스틴에게 불붙을 때 펠라기우스주의와 로마 카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의 토대가 마련되고, 루터에게 점화될 때 중세 천년의 적막이 깨어지고, 칼빈에게 작렬할 때 이 지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여 본 궤도에 진입하게 되었다.5)

칼빈주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성경에 있는 그대로이다. 즉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근본적 원리는 “하나님의 교리”, 즉 “성경 교리”에 궁극적 관심을 집중시킨다.

참된 칼빈주의자는 언제나 그 사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에 앞서 성경을 펼친다. 경건하게 살려는 노력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B. B. 월필드는 “칼빈주의자는 모든 만물의 현상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자이다. 따라서 그 만물의 현상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따라 일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자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의 모습을 만들어 가며, 그의 온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참된 영혼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구속하지 못할 줄 알아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 중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를 말한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신을 볼 때 자신은 죄인이요, 피조물로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으면서, 그래도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는 자이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자기 나름의 공로를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모든 사고방식에서 특히 그의 생활 활동의 모든 범위에서 지적, 영적, 도덕적 생활에서,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나님 되도록 결심하는 것이다.”고 하였다.6)

칼빈주의는 신학에 국한하는 협의적인 칼빈주의와 모든 사상체계 전부를 지시하는 광의적인 칼빈주의로 나눈다.

협의적으로 신학에 국한할 때 알미니안적 입장에 서 있는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일부 개신교의 신학사상에 대한 상대적인 개혁주의적 신학을 칼빈주의라고 한다. 이 경우 칼빈주의는 전제에 의해서 모든 사상을 전개한다. 이 전제는 사상 체계의 전개에서 중심 사상을 하나님에게 두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이론 및 바탕으로 삼는 일이다. 이러한 입장은 죄인의 구원을 강조하는 감리교회,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루터교회, 그리스도의 상처를 강조하는 모라비안교회, 교회의 공회성을 강조하는 로마 카토릭교회의 중심사상과는 전적으로 다르다.7)

그래서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조직신학이나 변증학은 신론에서부터 출발한다. 벌콮의 조직신학도 제1장이 신론이고, 반틸의 변증학도 신학은 신론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입장은 바로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 제 1권 1장이 신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 부분에서 “상호 연관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칼빈주의적 신학 사상의 대세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기본 사상을 예정론이나 예정론의 선택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예정론을 신학사상의 기본 원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한 내용을 결론으로 취급한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님을 강조한 내용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성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 신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풍자적으로 조작한 그릇된 개념으로 인하여 예정론이 칼빈주의의 유일한 중심사상인 것처럼 생각되어 왔던 것이다. 예정은 언제나 사람에게 상관되고, 사람에게 될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유일한 기본 원리가 될 수 없다. 칼빈주의의 첫 번째의 관심은 “하나님 존재”에 관한 사상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만큼 인간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8)

예정론은 칼빈주의 중심교리 중에서 고고히 그 하나 만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정론이 단순한 근본적 교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정론이 언제나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의 궁극적 관심사는 예정론이란 바로 신적 존재 사상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이 다만 인간에게 초점을 둔 교리의 선입주견으로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정론이 칼빈주의 신앙체계의 요지는 될 수 있으나 기초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붙들 때 인간은 참된 인도함을 받고 무오의 성경을 붙들 때 인간은 모든 진리의 경건함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칼빈주의자들은 무턱대고 어떤 사람(칼빈까지)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성경의 확증이 없이는 누구도 따르지 않는다.

칼빈주의자는 무한한 능력과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명백히 강조한다. 여기는 하나님의 선택, 효력 있는 부르심(내적 소명), 구원, 보호하심, 궁극적 구원으로 영화롭게 하심이 포함된다.

칼빈주의자들의 전 생애와 활동 범위는 성경에 의해서 정돈되어 진다. 가정사나, 교회사역이나, 그의 직장이나 사업, 사회생활 등의 전 영역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다.

칼빈주의자는 자기는 죄인이며, 자기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인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안다(엡 3:8-10). 이는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며 감사 가운데서 헌신할 중요한 근거가 된다.9)

그동안 우리는 달콤한 선악과의 유혹에 몇 십 년 동안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총회를 사랑하셔서 회복과 개혁의 이정표를 주셨다. 2025년 18일은 한 개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룹이 총회를 이탈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총회)라는 이름으로 109회 총회를 가졌다. 이는 다락방총회를 그럴 사한 이름으로 포장하여 한국 교회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2011년 6월 21일 개혁 총회에 전도총회가 흡수되면서 문을 닫았던 다락방전도총회의 부활이다. 어떤 이름의 간판을 걸고, 어떤 주장을 펼칠지라도 그들을 정통적인 개혁주의라고 볼 교단이나 신학자는 없다. 이제 우리 총회는 “다락방 이단”이라는 무겁고 거치던 짐을 내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의 칼빈주의(개혁주의)깃발을 올리고 힘찬 항해를 시작한다. “개혁”이라는 명칭이 표명한바와 같이 “바른 신학”, “바른 신앙”, “바른 생활”의 개혁이념을 따라서 진정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회복하여 청교도적인 모범을 따를 것이다. 바른 신학의 정립과 함께 주님이 지시하신대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힘쓸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위대한 항해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모든 목회자와 교회는 언제라도 수용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보수주의교회와 교류하고 협력함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1) 정원태, “열정칼빈주의” 1990. 9. 20, 기독교문서선교회, 표지의 글.

2) 정원태, 앞의 책 p. 9.

3) 김영재, “한국교회사” 1996. 8. 30, pp. 112-115.

4) 박아론 교수가 쓴 “새벽기도의 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이 1980년 3월 1일에 발행되었다

5) 정원태, 앞의 책 pp. 9,10.

6) B. B. Warfield, Calvin as a Theologian and Calvinism Today, pp. 23,24을, J. Green이 “칼빈주의 어제, 오늘, 내일”(정성구 역) pp. 11,12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7) 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p. 1을, 송종섭이 “칼빈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풀빛목회, 1983년 5월호 p. 27.

8) 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p. 38을, 송종섭 “칼빈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풀빛목회, 1983년 5월호 p. 27.

9) J. Green 저, 정성구 역, “칼빈주의 어제, 오늘, 내일”, 세종문화사, 1974. 3. 5,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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